
지난 7월, 페라리 혈통이 흐르는 자연흡기 V12의 굉음이 영국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 2026 언덕길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낸 차는 아폴로(Apollo)가 내놓은 에보(EVO)의 첫 번째 고객 사양, 바로 '캐리비안 드래곤(Caribbean Dragon)'이었습니다. 명칭 그대로 용을 형상화한 몸체에 카리브해의 색을 덧입힌, 지구상 오직 한 대만 존재하는 하이퍼카입니다. 언뜻 들으면 눈길을 끄는 원오프(one-off) 쇼카 한 대가 나왔다는 이야기로 들릴 법합니다. 그러나 속을 파고들면 이 차는, 파산으로 한때 자취를 감췄던 독일의 소규모 제작사가 20년을 견뎌 낸 끝에 끊은 결승선 테이프에 훨씬 가깝습니다. 이 한 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본문에서는 아폴로의 모태였던 굼페르트(Gumpert)의 초창기, 홍콩 자본이 떠받친 재기, 엔진을 함께 만들어 낸 기술 협력사, 마지막으로 그 모든 이야기가 녹아든 캐리비안 드래곤까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아우디 랠리 수장이 만든 트랙 머신, 굼페르트 아폴로라는 명칭의 뿌리에는 로란트 굼페르트(Roland Gumpert)라는 사람이 자리합니다. 그는 아우디 스포츠(Audi Sport)의 지휘봉을 잡고 월드랠리챔피언십(WRC)에서 통산 25회 우승과 종합 타이틀 4회를 손에 넣은 모터스포츠 백전노장이죠. 2004년 자신의 이름을 붙인 굼페르트 슈포르트바겐마누팍투어를 설립한 그는, 뮌헨 공대 등과 협력해 트랙 머신 한 대를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2005년부터 만들어진 차가 바로 굼페르트 아폴로였습니다. 이 차가 세상에 강렬하게 남은 순간은 2008년 영국 프로그램 <탑기어(Top Gear)>였습니다. 아폴로 스포트는 테스트 트랙에서 1분 17초 1의 랩타임을 기록하며 파워랩 순위표 맨 꼭대기를 차지했죠. 부가티 베이론과 파가니 존다마저 뒤로 밀어낸 성적이었습니다. 당대 하이퍼카 최정상과 대등한 성능임을, 굼페르트가 기록으로 입증한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소규모 제작사라는 운명이 걸림돌이 됐습니다. 익명의 투자자가 손을 떼자 2013년 8월 회사는 결국 파산 절차를 밟게 됩니다. 실력은 갖췄으나 그것을 지탱해 줄 자본과 덩치가 부족했던 탓이었죠. 홍콩 자본이 이끈 아폴로로의 재기 주저앉은 브랜드를 다시 세운 힘은 외국 자본이었습니다. 2016년 1월, 홍콩의 컨소시엄인 아이디얼 팀 벤처(Ideal Team Venture)가 회사를 인수하며 사명을 아폴로 오토모빌(Apollo Automobil)로 교체합니다. 창업자의 성(姓)을 지워 내고, 본래 차종명이었던 '아폴로'를 브랜드 이름으로 끌어올린 판단이었죠. 되살아난 아폴로는 이내 야망을 내비쳤습니다. 2016년 제네바 모터쇼에 공개한 콘셉트 애로우(Arrow)는 4.0리터 트윈터보 V8을 얹어 986마력을 뽐냈습니다. 이어 2017년, 브랜드가 나아갈 길을 못 박는 차가 나타나죠. 그 주인공이 인텐사 에모지오네(Intensa Emozione, IE)입니다. '강렬한 감정'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이름처럼, 곤충과 자연에서 착안한 도발적 형태에 순수 내연기관의 감각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트랙 하이퍼카였습니다. 디자인은 조윈 웡(Jowyn Wong)이 이탈리아 마니파투라 아우토모빌리 토리노( MAT)와 손잡고 마무리했습니다. 굼페르트가 '성능으로 실력을 증명한 브랜드'였다면, 부활한 아폴로는 스스로를 '순수 내연기관의 감정을 파는 브랜드'로 새롭게 규정한 셈입니다. 심장부 — 페라리 6.3 V12, 그리고 HWA의 손길 아폴로 IE와 에보를 하나로 꿰뚫는 요소는 바로 엔진입니다. 두 모델 모두 페라리에 뿌리를 둔 6.3리터 자연흡기 V12를 품고 있죠. 페라리 F140 계열을 바탕으로 이를 손질해 낸 주체가 메르세데스-AMG 모터스포츠 자회사에서 떨어져 나온 HWA AG입니다. 아폴로가 독자 엔진을 만들어 낼 만한 몸집이 못 되는 소규모 제작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페라리의 명작 엔진에 레이스 전문가의 손질을 더하는 이 조합 그 자체가 브랜드의 생존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원형에 해당하는 IE의 제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폴로 IE (2017~) 핵심 제원 6.3L 자연흡기 V12 · 780PS(약 769마력)/8,500rpm · 76.0kg· m/6,000rpm · 레드존 9,000rpm · 건조중량 1,250kg · 다운포스 1,350kg(299km/h) · 0-97km/h 2.7초 · 최고 335km/h · 6단 헤월랜드 시퀀셜 · 카본 모노코크 · 단 10대 · 약 34억 원(당시 €2.3M) 제원에서 특히 주목할 지점은 레드존 9,000rpm입니다. 터보로 출력을 뽑아내는 흐름 속에서, 아폴로는 일부러 고회전 자연흡기를 고집했죠. 제원표상의 최고속도가 아니라 '회전하며 절규하는 감각' 그 자체를 상품으로 내걸었다는 의미입니다. IE에서 에보로, 무엇이 바뀌었나 에보(EVO)는 2021년 11월 중국 국제수입박람회에서 최초 공개된, IE의 계보를 잇는 진화 모델입니다. 뼈대와 엔진은 그대로 물려받되 완성도를 한 층 더 높인 차죠. 두 모델을 나란히 세워 보면 지향점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요점은 출력을 800마력 선까지 밀어올리는 동시에, 1,300kg 안팎이라는 극한의 경량과 차체 자체만으로 1,350kg에 이르는 다운포스를 동시에 거머쥐었다는 데 있습니다. 번호판을 내려놓는 대가로 물리 법칙을 극한까지 끌어 쓰는, 순수 트랙 하이퍼카의 방식 그 자체죠. 캐리비안 드래곤을 뜯어보다 그리고 2026년 굿우드 무대에서 에보의 첫 고객 사양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습니다. 그 차가 곧 캐리비안 드래곤입니다. 아폴로의 개인 맞춤 제작 프로그램인 '포지(Forge)'를 거쳐 한 고객이 주문한 원오프로, 그 이름에 걸맞은 값어치를 색채와 소재로 구현해 냈습니다. 1. 카리브해를 담아낸 투톤 보디 펄 화이트 위에 다이아몬드 더스트 마감을 얹어 카리브해의 흰 모래사장을 나타냈고, 오션 블루 악센트와 푸른 틴트를 씌운 카본으로 바다를 표현했습니다. 엔진 커버와 보닛, 프런트 휠아치, 루프 스쿠프에는 파란 카본을 넣었으며, 앞바퀴는 흰색으로 뒷바퀴는 파란색으로 나눠 마감했습니다. 도장 작업 한 가지에만 1,000시간이 넘게 소요됐습니다. 2. '드래곤 스킨' 3D 프린팅 배기 용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대놓고 표출되는 부위는 배기계입니다. 티타늄을 3D 프린팅으로 제작한 이 배기는 겉면에 '드래곤 스킨(용 비늘)' 질감을 입혔으며, 1,000도의 열기도 버텨 냅니다. 이 한 벌을 찍어내는 프린팅에만 123시간이 소요됩니다. 3. 일일이 맞춘 75장의 카본, 그리고 실내 차체는 75장을 웃도는 카본 패널을 한 장씩 사람 손으로 맞춰 마무리했습니다. 실내에는 푸른 틴트 카본 모노코크를 바탕으로 3D 프린팅 알루미늄 대시와 센터 콘솔, 통알루미늄 스티어링 휠, 흰색과 파란색 가죽 시트, 여기에 레이싱 하네스까지 더했습니다. 화면으로 뒤덮기보다 물리 스위치를 전면에 내세운 구성입니다. 아폴로가 놓인 위치 똑같은 하이퍼카라 해도 아폴로가 서 있는 자리는 페라리·람보르기니와 결이 다릅니다. 이들은 도로 인증을 획득해 수백에서 수천 대를 판매하는 브랜드지만, 에보는 도로 인증 자체를 내려놓은 순수 트랙 머신이자 단 10대에 그치는 원오프의 모음이죠. 물량과 편의성으로 맞붙는 대신, '번호판 없는 레이스카를 개인 취향에 맞춰 만들어 준다'는 극단적 희소성으로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굼페르트 시절의 '성능 증명'에서 부활한 아폴로의 '감정과 맞춤'으로. 20년에 이르는 이 브랜드의 발자취가 캐리비안 드래곤이라는 단 한 대에 고스란히 포개집니다.
2026-07-16T03:00: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