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가 리브랜딩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재규어가 리브랜딩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재규어(Jaguar)는 2024년 11월, 로고에서 도약하는 재규어(leaping cat) 엠블럼을 걷어 내고 "카피 낫싱(Copy Nothing)"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 정체성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12월 마이애미 아트 위크에서 그 첫 산물인 타입 00(Type 00) 콘셉트를 세상 앞에 꺼내 놓았죠. 재규어 타입 00 콘셉트 — 리브랜딩이 낳은 첫 물리적 결과물, 마이애미 핑크 반응은 양극단으로 쪼개졌습니다. 차가 단 한 대도 나오지 않는 광고 영상, 70년 넘게 붙어 있던 동물 엠블럼의 제거, 여기에 아예 갈아엎은 서체까지 말이죠. 오늘은 살짝 결이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만약 재규어가 이 리브랜딩을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눈앞엔 어떤 재규어가 있었을까." 그 답을 쥐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20년 동안 재규어 디자인을 진두지휘한 이안 칼럼(Ian Callum)입니다.   이안 칼럼의 재규어, 20년에 걸쳐 쌓아 올린 것 이안 칼럼 — 1999년부터 2019년까지 재규어 디자인을 총괄한 인물 칼럼은 1999년 재규어에 몸담은 뒤 2019년까지 디자인 전반을 이끌었습니다. 그가 넘겨받은 재규어는 S-타입이나 X-타입처럼 옛 향수에 기대던 복고풍 브랜드였는데, 그는 이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송두리째 갈아엎었죠. 그의 철학은 간결하면서도 또렷했습니다. "아무도 재규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은 재규어를 원해야 한다. 그건 욕망의 문제다." 그는 좋은 디자인의 잣대를 이렇게 재치 있게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집에 다다라 차에서 내린 다음, 현관 앞에서 몸을 돌려 자기 차를 몇 초나 눈에 담느냐. 재규어라면 그 시간이 5초는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죠. 재규어 F-타입 — E-타입 이후 재규어가 내놓은 첫 정통 2인승 스포츠카 그 20년이 낳은 결실이 F-타입과 XE, XF, XJ 세단, 여기에 F-페이스와 I-페이스 같은 차들입니다. 그중에서도 F-타입은 전설로 남은 E-타입 이후 재규어가 처음 선보인 2인승 스포츠카였고, 전기 SUV인 I-페이스는 테슬라를 앞질러 프리미엄 전동화의 문을 두드린 차였죠. 정작 칼럼 자신은 XF를 최고의 성취로 꼽습니다. 재규어를 전통에서 현대로 넘겨 준 분기점이었다는 이유에서요.   끝내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차들 취소된 전기 재규어 XJ — 양산 문턱까지 갔다가 멈춰 선 플래그십, 출처 CarExpert 칼럼이 떠난 뒤에도 재규어의 앞날은 이미 상당 부분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이 전기 XJ죠. 순수 전기 플래그십 세단으로 설계돼 최종 양산 직전 검증 단계까지 다다랐던 이 차는, 2021년 티에리 볼로레 CEO가 내건 "리이매진(Reimagine)" 전략 아래 막판에 백지화됐습니다. 새로운 전용 전기 플랫폼으로 노선을 바꾸면서, 랜드로버용으로 굳어진 MLA 플랫폼 위에 올라 있던 XJ가 발 디딜 곳을 잃은 것이죠. 양산 채비를 마친 플래그십이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재규어 C-X75 — 칼럼이 2010년에 그려 낸 하이퍼카, 영화 007 스펙터에서 악역의 차량으로도 나왔다 시계를 더 거슬러 올리면 C-X75가 자리합니다. 2010년 칼럼의 손에서 나온 하이퍼카로, 애초 구상은 소형 가스터빈을 발전기 삼고 네 바퀴에 전기모터를 붙인 778마력짜리 혁신적 구성이었죠. 겨냥한 최고속도는 320km/h. 양산까지 발표됐지만 세계적 경기침체에 부딪혀 엎어졌고, 나중에 영화 007 스펙터에서 5.0리터 슈퍼차저 V8을 얹은 스턴트카로 되살아났습니다. 재규어가 하이엔드 스포츠의 꼭대기에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었는지를 증명한 차죠.   리브랜딩이 지워 버린 것 마지막 재규어 F-타입 R75 — 575마력, 재규어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마지막 V8 스포츠카 리브랜딩을 계기로 재규어는 그동안의 라인업을 사실상 통째로 접었습니다. 브랜드의 상징이던 F-타입은 2024년 6월 캐슬 브롬위치 공장에서 마지막 생산을 마쳤죠. 최후의 특별판 R75는 575마력으로, 재규어가 빚어낸 가장 강력한 V8이자 동시에 마지막 V8이 됐습니다. 맨 마지막 한 대는 E-타입이 마지막으로 생산된 날로부터 딱 50년째 되는 날에 만들어져 재규어 헤리티지 컬렉션에 안착했습니다. 70여 년간 재규어를 상징해 온 도약하는 재규어 엠블럼 — 새 브랜드 정체성에서 밀려났다 그와 동시에 1950년대부터 차체를 장식해 온 도약하는 재규어 엠블럼도 브랜드 정체성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라인업에 생긴 빈자리, 상징의 소거, 여기에 "카피 낫싱" 캠페인의 파격까지. 재규어는 아예 새로운 관객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고, 그 여정에서 여태 쌓아 온 재규어다움을 상당 부분 스스로 내려놓은 셈입니다.   칼럼의 눈에 비친 타입 00 타입 00 콘셉트 — 긴 보닛과 패스트백 실루엣, 23인치 휠. 런던 블루 막상 이 브랜드를 20년간 이끌어 온 칼럼의 평가는 냉정했습니다. 그는 타입 00을 놓고 "대단히 대담하고 극적이며, 그 극단성만큼은 용감하다"고 추어올리면서도, 결정적으로 "아름다움이 비어 있다"고 꼬집었죠. 재규어 디자인이 붙드는 핵심 잣대가 곧 아름다움인데, 타입 00은 나쁜 디자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비례가 지나치게 복고로 흘렀다는 지적입니다. 전동화라는 방향을 두고도 그는 미심쩍어했습니다. 슈퍼카를 사는 층은 대체로 연령대가 있는 세대이고, 이들에게는 엔진의 사운드와 변속의 감각이 여전히 각별한데, 정작 전기 슈퍼카를 진짜 바라는 사람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울러 그는 타입 00을 위해 이미 굴러가던 여러 모델이 멈춰 섰다는 사실도 털어놓았죠. 리브랜딩이 그저 로고를 바꾼 일이 아니라, 실제로 제작되던 차들을 세워 버린 결정이었다는 뜻입니다.   칼럼이 내다보는 또 다른 미래 칼럼 디자인이 빚은 현대적 XJ220 스터디 — 원형의 실루엣은 지키되 모든 면과 비례를 새로 풀어냈다 그렇다면 칼럼이 머릿속에 그리는 재규어의 앞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는 자기 회사인 칼럼 디자인(Callum Designs)을 통해 전설적인 XJ220을 현대적으로 다시 풀어낸 디자인 스터디를 공개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슈퍼카 가운데 하나를 오늘의 시선으로 해석했다"는 설명 그대로, 원형이 지닌 또렷한 실루엣은 남겨 두면서 모든 표면과 디테일, 비례를 현대의 렌즈로 다시 짜냈죠. 흥미로운 점은 이 스터디가 C-X75의 비례를 밑바탕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엎어진 하이퍼카의 DNA가 이 자리에서 다시 이어지는 셈이죠. 칼럼 XJ220 스터디 GT1 레이싱 버전 — 디자인 스터디를 넘어 실제 제작 가능성까지 내비친다 칼럼 디자인은 여기에 GT1 레이싱 버전까지 얹었습니다. 아직 "디자인 스터디" 단계인 만큼 양산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자금이 넉넉한 고객이 의뢰만 하면 실제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뒀죠. 만약 재규어가 리브랜딩이라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우리는 전기 XJ 플래그십과 여전히 명맥을 잇는 F-타입의 후계, 그리고 도약하는 재규어 엠블럼을 단 라인업을 마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 뿐이죠. 재규어의 선택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타입 00의 양산형과 시장의 반응이 앞으로 몇 년에 걸쳐 답을 내줄 겁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브랜드가 방향을 크게 꺾을 때 사라지는 것들의 값어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선명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V8을 품은 F-타입 R75,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전기 XJ, 그리고 무산된 C-X75 같은 차들은 이제 두 번 다시 만들어지지 않죠. 한 시대가 문을 닫을 때, 그 시대의 마지막 물증들이 컬렉터의 언어로는 가장 값진 존재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026-07-01T03:00: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