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라렌 리브랜딩, 스피드마크 대신 워드마크를 앞세운 이유

맥라렌 리브랜딩, 스피드마크 대신 워드마크를 앞세운 이유

맥라렌이 9월 22일 새 아이덴티티를 선보였습니다. 얼핏 로고 하나 바꾼 정도로 보이지만, 브랜딩 측면에서는 1997년 이후 가장 큰 폭의 방향 전환이에요. 29년간 맥라렌의 얼굴이던 스피드마크가 주 식별자 자리를 내주고, 그 자리를 워드마크가 차지했습니다. 무엇이 바뀌었는지보다는 왜 바꿨는지, 그리고 이 선택에서 맥라렌이 앞으로 하려는 일이 어떻게 읽히는지를 이 글에서 다뤄보려 합니다. 새 워드마크는 맥라렌 산스라는 전용 서체로 전부 대문자다 달라진 요소부터 살펴봅니다 새 워드마크에는 맥라렌 산스(McLaren Sans)라는 전용 서체가 쓰였습니다. 모두 대문자이고 획은 이전보다 얇아졌으며, C 아래쪽에 짧은 가로선 하나가 들어가요. 크리에이티브 블로크는 예전 로고가 두툼하고 레트로퓨처 분위기였다고 했고, 새 로고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 로고 옆에 나란히 둬도 어색하지 않다고 평했습니다. 이번 리브랜딩의 핵심은 이 글자꼴이 어디서 왔느냐에 있습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레무에라에 1926년 지어진 정비소, 브루스 맥라렌의 부모인 레스와 루스가 운영하던 바로 그곳의 손으로 그린 간판에서 글자를 따왔거든요. 브루스가 1929년식 오스틴 세븐을 손질해, 열다섯 살에 뮤리와이 해변에서 첫 우승을 거둔 차를 만들어낸 장소이기도 하죠. 스피드마크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로드카와 레이스카 모두에 계속 들어가고, 골프나 레이싱 서브브랜드에서는 지금처럼 전면에 나서요. 다만 브랜드를 대표하는 첫 번째 얼굴 자리는 이제 워드마크 몫입니다. 스피디 키위, 헤리티지 실드, 쉐브론 역시 각자 역할을 받아 체계 안에 남았고요. 확장된 컬러 팔레트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중심은 변함없이 파파야이고, 여기에 엠버(레이싱 슈트에서), 미드나잇(초기 맥라렌 차량에서), 블랙과 앤트러사이트(소재와 엔지니어링에서), 콜른브룩(브루스가 처음 차를 만들기 시작한 버크셔 마을), 미스트 뮤리와이(첫 우승을 거둔 해변)가 더해졌어요. 새 아이덴티티는 맥라렌 오토모티브와 맥라렌 레이싱(F1·인디카·WEC), 여기에 2025년 시작한 라이선싱 사업까지 전부 적용됩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자산마다 붙은 출처입니다 브랜딩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발표에서 컬러 이름부터 눈에 들어올 겁니다. 콜른브룩, 뮤리와이, 레무에라. 색 이름이 하나같이 지명 아니면 시점입니다. 파파야 역시 브루스가 서킷에서 차가 눈에 잘 띄도록 고른 색이라는 출처가 달려 있죠. 서체 또한 특정 연도의 특정 간판에서 나왔고요. 시각 자산마다 출생지가 하나씩 적혀 있는 셈이에요. 확장된 팔레트의 색 이름은 전부 지명이거나 시점이다 브랜드 업계에서는 이런 방식을 프로비넌스(provenance) 전략이라고 합니다. 성장 국면에 접어드는 럭셔리 브랜드가 자주 꺼내는 방법이죠. 이유는 분명해요. 그동안 맥라렌의 가치를 받쳐준 건 희소성이었습니다. 한 해 몇천 대 만드는 슈퍼카 회사였으니까요. 그런데 지난주 맥라렌이 내놓은 발표가 무엇이었나요. 5억 파운드 투자, 첫 SUV, 생산 인력 두 배. 볼륨을 키우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볼륨이 커지면 희소성만으로는 브랜드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 빈자리를 메워야 하는 것이 서사죠. 우루스가 람보르기니의 절반을 팔아치워도 람보르기니가 여전히 람보르기니인 건 페루치오와 황소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에요. 맥라렌은 SUV를 내놓기에 앞서 그 이야기의 뼈대부터 세운 셈입니다. 정비소 간판, 열다섯 살의 첫 우승, 해변 이름. SUV에도 라이선스 상품에도 붙일 수 있는 출처를 말이죠. 두 번째 포인트는 심볼보다 앞에 선 워드마크입니다 심볼을 앞세우는 브랜드와 워드마크를 앞세우는 브랜드는 성격부터 다릅니다. 스피드마크 같은 심볼은 먼 거리에서도 식별되고 언어의 장벽이 없어요. 서킷과 차 앞코에 최적화된 자산입니다. 워드마크는 반대로 이름 자체를 팔아야 할 때 유리하죠. 매장 간판, 패키징, 협업 제품, 의류 태그처럼 이름이 글자로 읽혀야 하는 자리들입니다. 워드마크를 앞세운 맥라렌의 선택에서는 브랜드가 살아갈 무대를 서킷 바깥까지 넓히겠다는 의도가 읽힙니다. 2025년에 라이선싱 사업을 별도로 세운 일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지고요. 서체를 다룬 방식에서 방향은 더 뚜렷해집니다. 모두 대문자에 얇은 산세리프죠. 2018년 버버리와 생로랑, 셀린이 차례로 걸어간 바로 그 길입니다. 그때 업계에서는 브랜드가 죄다 비슷해진다는 의미로 블랜딩(blanding)이라 부르며 비꼬기도 했어요. 맥라렌 역시 그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패션 브랜드 같다는 크리에이티브 블로크의 평이 칭찬으로도, 지적으로도 읽히는 까닭이죠. C 아래 가로선은 정비소 간판에 실제로 있던 요소다 그래도 맥라렌은 빠져나갈 구멍 하나를 마련해뒀어요. 바로 C 아래의 가로선입니다. 정비소 간판에 실제로 있던 요소이고, 다른 대문자 산세리프 워드마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디테일이죠. 브랜딩 용어로는 소유 가능한 자산(ownable asset)이라고 합니다. 글자꼴이 유행을 아무리 따라가도 저 선 하나가 맥라렌임을 붙잡아주거든요. 작지만 계산이 깔린 장치입니다. 둘로 나뉜 회사를 묶는 하나의 얼굴 지금 맥라렌 오토모티브와 맥라렌 레이싱은 소유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오토모티브는 2024년 말 아부다비 CYVN 홀딩스로 넘어갔고, 레이싱은 맥라렌 그룹 아래에 그대로 있어요. 회사는 둘로 갈라졌는데 이름은 하나를 함께 써온 셈이죠. 새 아이덴티티는 이 둘을 다시 하나의 표현 체계 안에 묶어줍니다. 맥라렌 공식 문구도 오토모티브와 레이싱의 과거·현재·미래를 하나의 연결된 표현으로 가져온다는 내용이었죠. 오토모티브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데이비드 우드하우스와 레이싱 최고 마케팅 책임자 루 매큐언이 같은 보도자료에 나란히 인용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브랜드 아키텍처 측면에서는 라이선스 자산을 정리하는 작업으로도 볼 수 있어요. 두 회사가 저마다 다른 로고를 쓰기 시작하면 라이선싱 사업 자체가 성립하지 않거든요. 시각 체계를 하나로 먼저 못 박아둬야 누가 무엇을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정할 수 있습니다. F1, 인디카, WEC와 로드카가 같은 체계를 쓴다 과감한 모험에 나선 맥라렌 스피드마크는 29년을 쌓아온 자산입니다. 1997년에 등장한 뒤로 해밀턴, 노리스, 피아스트리에 이르기까지 F1 팬 세대 전체가 이 마크로 맥라렌을 기억하죠. 이걸 뒤로 물리면 단기적으로는 반발이, 장기적으로는 인지 자산의 희석이 따라옵니다. 크리에이티브 블로크 역시 팬들 심기를 건드릴 거라고 했어요. 서브브랜드에 스피드마크를 남긴 건 맥라렌도 이 리스크를 알기 때문이겠지만, 앞에 서는 자산이 바뀌면 뒤에 남은 자산은 결국 작아지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는 서사와 제품이 어긋나는 경우입니다. 헤리티지를 이만큼 촘촘하게 깔아두면 그 무게를 제품이 받쳐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아투라는 초기 품질 문제와 밋밋한 디자인 탓에 2028년 단종이 예고됐고, 다음에 나올 차는 SUV입니다. 정비소 간판 서체를 단 SUV가 브루스 맥라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질지는 결국 그 차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어요. 브랜드가 약속한 것을 제품이 지키지 못하면 헤리티지는 장식으로 남습니다. 스피드마크는 29년 동안 맥라렌의 첫 번째 얼굴이었다

2026-09-26T03:00:00+00:00